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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워리어 정수진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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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1,034회 작성일 20-01-1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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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편





정수진……. 돌이켜보면 그녀와의 첫 만남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다. 심지어 우리의 첫 만남이 오프라인에서였다는 사실조차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그저 동아리에 들어와 알게 된 선배일 뿐이었으니.



나만 알고 있는 그녀와의 첫 만남은 사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더럽게 불쾌했다. 누구라도 그런 욕을 들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그녀를 만났을 때는, 오히려 그만큼 더 즐거웠었다. 지금부터 나는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





“이 개새끼가!”



무더운 여름날에, 나는 결국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마우스를 쥔 손이 부르르 떨리며, 모니터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내 캐릭터를 처참하게 죽여 버린 모니터 속 플레이어는 내 시체에다 대고 온갖 조롱과 퍼포먼스를 가하며 채팅창에 ‘ㅋ’을 남발했다.



‘ㅋㅋㅋㅋㅋㅋ 졸라 약해.’

‘뒤질래?’

‘응ㅎㅎ 죽여 봐 ^^ㅗ’



온라인 게임에서 빠질 수 없는 콘텐츠가 바로 P.K(Player Killing)이긴 하지만, 가끔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공격을 해오는 소위 ‘비매너 플레이어’들과 한 번씩 마주치곤 한다.



이런 비매너 플레이어들은 대개 장비나 레벨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 경우가 많다. 그걸 활용해서 속칭 ‘쪼렙(레벨이 낮은 초보 플레이어)’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다니는 것이다.



보통 온라인 게임에서는 P.K가 가능한 게임 상의 지역을 따로 구분해놓는 경우가 많지만, 내가 하던 게임은 사냥을 하러 필드 밖으로 나가면 자유롭게 상대 플레이어를 공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되어있었다. 그 자유로운 시스템 때문에 오히려 인기를 끌기도 했던 것 같다.



‘오프에서 마주치면 벌벌 길 새끼가 얼굴 안 보인다고 졸라 깝치네?’

‘풋ㅋㅋㅋㅋ 웬 오프 드립? ^^ 괜히 허접이라 열 받으니까 오프 드립이세요?’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 자유로운 시스템이 정말 짜증난다. 초보 지역에서 놀고 있던 나를 난데없이 한 방에 썰어 죽이는 것도 모자라 시체까지 갖고 놀다니…….



나는 채팅창으로 위협적인 욕설을 퍼부으며 대들었지만, ‘jinistar(지니스타)’라는 아이디의 상대방은 오히려 그럴수록 나를 더욱 모욕하고 놀려댔다.



‘자신 있으면 전번 까보든가.’

‘니 엄마한테 까라 그래 허접아 ^^ㅋ’



심지어 몰상식한 패드립(부모님이나 조상을 모욕하는 말)까지……. 인터넷의 익명성이 주는 폐해는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직접 당하는 순간이 될 때면 울컥 화가 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말로 위협하는 것 말고는 내가 보복할 수 있는 길이 아무 것도 없어서, 나는 그저 놈에게 의미 없는 욕설만 반복할 뿐이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나올수록 놈은 그 반응을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렙 좀 높다고 초보들 썰고 다니면 기분 좋은가보지?’

‘응 ^^ㅋㅋㅋㅋ 졸라 좋아 헤헤. 너 같은 허접새끼들 패주는 게 제일 재밌더라.’

‘너 진짜 눈앞에 있었으면 개박살 나는 건데.’

‘히익 무서워ㅠㅠ 찾아와보던지 등신아.’



한도 끝도 없이 까불어대는 놈과 더 이야기해봤자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았다. 이는 으드득 갈렸지만 결국 게임을 종료했다. 이미 잡친 기분으로 게임을 해봤자 재밌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고 나서 게임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같은 게임을 하는 유저들끼리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친목 사이트였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보통 온라인 게임에는 공식 커뮤니티가 하나씩은 있어서 소통의 공간으로 자주 쓰였다.



나는 그곳에다 jinistar라는 캐릭터를 캡처한 사진을 올렸다.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게임 내에서 불화가 생기면 이런 식으로 커뮤니티에 사연을 올리곤 했다. 어차피 법적인 신고는 힘들 테니 많은 유저들에게 알림으로써 그나마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사진을 올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jinistar라는 똑같은 아이디가 사진에 댓글을 다는 게 아닌가.



‘풋ㅋㅋㅋㅋㅋ 아까 나한테 죽은 그 허접새끼네. 억울해서 여기다 사진 올리고 고자질하는 거예요? 우쭈쭈 우리 허접새끼ㅠㅠㅋㅋㅋㅋ’



이 개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커뮤니티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던 건가? 나는 참다못해 댓글로 현란한 욕을 싸지르며 놈과 화려하게 싸움을 벌였다. 각종 욕설과 지저분한 소리로 난무하기 시작하는 댓글 창을 보고 몇몇 회원들이 ‘ㅉㅉ’ 하며 혀를 찼다. 



‘너 전번 까보래도? 쫄았냐?’

‘딱 봐도 목소리 X 같을 거 같은데 들어서 뭐해ㅋㅋㅋㅋ’

‘전화도 못 할 초딩 새끼가 입만 살았네. 길에서 눈에 띄지 마라.’

‘아이고, 네네 허접새끼님 ^^ 엿이나 처 드세요ㅗㅗ’



결국 댓글 창에서도 나는 실컷 놈에게 조롱만 당하고 끝났다. 그 길고긴 욕설 배틀 끝에 남은 거라곤 너덜너덜해진 내 멘탈 뿐이었다.



“이런 새끼는 진짜 실제로 만나면 아주 죽여 버리는 건데…….”



키보드에서 손을 떼며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그로부터 6개월도 더 지난 후의 일이다.



내가 가입한 게임 동아리는 사실 원래 목적이 ‘게임 콘텐츠 개발’을 연구하는 곳이긴 했지만 그거야 말뿐이었고, 사실상 주로 하는 일이라곤 거의 PC방 가서 게임하고 그러다 저녁 되면 술 마시러 가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게 의외로 히트를 쳤는지, 게임 좋아하는 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몰려드는 바람에 재작년부터는 아주 인기 있는 동아리가 되었다. 주로 학교 앞에서 홀로 자취하는 애들이 심심해서 가입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럿이서 게임하기 좋아하는 학생들도 종종 찾아왔다.



나 또한 복학하고 친구도 없이 학교 생활하는 게 외로워서 이 동아리에 들게 되었다. 덕분에 친구도 제법 사귀고 재미도 있고 뭐 나름대로 다 괜찮았다. 물론…… 이 동아리의 성격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여자가 없다’는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하긴 했지만 말이다.



“자! 고귀하신 여성 회원님의 가입을 축하하며! 모두 건배!”

“건배!”



그러던 어느 날, 이 삭막한 동아리에 몇 안 되는 예외가 새로 생겼다.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온다는 그 환상 속의 존재, 여자 후배가 가입한 것이다. 회장은 감격에 겨워 그날 바로 회식을 잡았고 우리는 근처 호프집에서 조촐하게 그녀의 가입을 환영해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00학번 이영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영미라는 그 아이에 대한 인상은, 솔직히 그저 그랬다. 작달만한 키에 흔한 얼굴, 흔한 몸매라 정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성으로 느껴지거나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뭐 성격이 활발해보여서 금세 친해지긴 했다. 오빠, 동생하며 지내기엔 재미있는 후배일 것 같았다.



“우리 게임 동아리답게 한잔 했으면 이제 한판 땡기러 가야지!”

“에이, 오늘은 술 마시고 싶은데.”

“겜 하다가 또 와서 마시면 되잖아.”

“그럼 콜!”



어느 정도 맥주를 마시고 나서, 회장은 우리를 이끌고 우르르 PC방으로 향했다. 새로 들어온 영미를 축하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PC방에 와서도 분위기는 여전히 그녀가 중심이었다.



“영미는 게임 좋아해?”

“그럼요! 완전 좋아하죠. 그러니까 동아리 들어왔죠.”

“무슨 게임 하는데?”

“뭐, 이것저것 해요.”



그녀는 자신이 주로 하는 게임들을 줄줄 늘어놓았지만 대부분 내가 하지 않는 것들이라서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회장은 영미를 띄워주고 싶었는지 그녀가 주로 하는 FPS게임을 다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 덕분에 나는 아이디만 만들어놓고 거의 하질 않았던 총질 게임에 오랜만에 접속하게 되었다.



“아, 근데 숫자가 안 맞네. 지금 6 대 5인데.”

“그냥 해요. 영미는 보너스로 끼운다고 치지 뭐.”

“어머, 저 이래봬도 잘하는데요? 후회하실 걸요.”

“그럼 어떡해? 한명 뺄까?”



어차피 나는 그다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인원수를 핑계 삼아 슬쩍 빠질까 했는데, 영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내놓았다.



“으음, 그럼 제 친구 한명 부를까요? 친구목록 보니까 지금 접속해있는 것 같은데.”

“오오, 친구? 여자애?”

“네.”



회장의 그 속보이는 질문에 영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부원들도 덩달아 환호하며 콜을 외쳐댔다. 정말이지 알기 쉬운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



영미가 귓말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아이디가 게임 채널로 입장했다. 남자 놈들이 저마다 요란하게 인사를 해대는 와중에, 나는 문득 그 영미 친구의 아이디가 눈에 띄었다.



‘jini……star?



지니스타. 왠지 한번쯤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어디서 들었더라?



“영미야, 친구도 잘해?”

“네. 엄청 잘해요. 아마 여기서 제일 잘할지도 몰라요.”

“에이, 설마.”



회장은 여성 유저가 둘이나 끼어있는 상황이 마냥 신나기만 하는 듯, 공평하게 영미와 영미 친구를 서로 다른 편에 배치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나는 영미와 같은 편이 되었다.



FPS게임답게, 시작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총알이 난무했고 수류탄이 심심찮게 날아왔다. 나는 어기적대며 은폐물 뒤로 캐릭터를 숨겼다. 하지만 몸을 숨기자마자 저 멀리서 저격이라도 하듯이 총알이 슝 하고 날아와 내 캐릭터의 머리통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headshot’이라는 문구가 화면에 뜨면서 내 캐릭터는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나를 저격한 캐릭터의 아이디를 보았다. jinistar…… 영미의 친구 아이디였다.



‘호오…… 이것 봐라.’



비록 영미의 친구가 그 자리에 실제로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왠지 얼굴도 모르는 영미 친구가 나를 비웃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곧이어 캐릭터가 리스폰(부활)되었고, 나는 그 때부터 영미 친구를 사냥하기 위해 맵을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미 친구를 잡기는커녕 번번이 내가 맞아죽기 일쑤였다.



‘씁…… 이거 은근 약 오르는데.’



물론 내가 그 게임을 평소에 잘 하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영미 친구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영미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니스타라는 아이디는 나 이외에도 동아리 회원 여럿을 작살내며 종횡무진 필드를 휘젓고 다녔다.



‘딱 한번만 잡아보자. 딱 한번만.’



게임이 끝날 무렵이 다 되어서도 바닥에 눕기만 할 뿐 그녀를 한 번도 잡질 못하자, 나는 거의 집착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에 마침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체력이 간당간당하게 남은 지니스타의 등 뒤를 잡게 된 것이다.



‘죽어라, 이 년!’



캐릭터의 등에 대고 냅다 총알을 날렸지만, 지니스타는 뒤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날쌔게 몸을 날려 은폐물 뒤로 숨었다. 나는 그야말로 눈이 시뻘개져 그 뒤를 추적해 달려갔다. 하지만 은폐물 너머로 뛰어든 순간, 지니스타가 돌아서서 내 캐릭터를 단숨에 죽여 버리고 말았다.



“아오!”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다. 결국 그녀를 한 번도 잡지 못한 것이다. 남자로서 창피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영미 친구가 정말 여자애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니스타가 죽은 내 캐릭터의 시체 위로 다가와 마구잡이로 칼질을 해댔다. 마치 시체를 조롱하는 것 같은 특유의 퍼포먼스……. 나는 모니터 너머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제야 그 아이디를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려냈다.



“그 때 그 새끼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는 나를, 몇몇 회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이야, 영미 친구 진짜 잘하는데? 진짜 여자애 맞아?”

“네. 같은 학과 친구에요.”

“헐, 진짜? 그럼 우리 학교 애야?”

“네. 학번도 같아요.”



회장과 영미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이어나갔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영미에게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그 친구도 게임 잘하는 것 같던데, 한번 동아리에 데려오면 안 돼?”

“음, 그럴까요? 친구는 혼자 게임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그래도 말이나 한번 해봐.”



회장은 내가 꺼낸 말이 무지하게 마음에 드는 듯, 계속해서 영미에게 재촉했다.



“아예 지금 와보라고 하는 건 어때? 여자 회원 들어오면 완전 여왕 대접 받는다고 꼬셔봐.”

“걔가 학교 앞에서 자취해서 이 근처에 있긴 할 텐데. 전화해볼까요?”

“오오! 콜! 콜!”



남자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소리 질렀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가슴이 뛰었다. 비록 게임이 다르긴 했지만 그 아이디는 분명히 내가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아이디였다.



‘우연일까? 동명이인처럼 단순히 같은 아이디일지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정말 싸가지 없는 놈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떠올랐다. 정말 내가 봤던 그 싸가지가 영미의 친구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봐야 아는 거겠지만…… 어찌됐든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나쁠 것은 없었다.



“어어, 수진아. 너 혹시 지금 자취방이야?”



모두들 숨죽이고 영미의 통화 내용에 귀 기울였지만 나는 그동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잠시 후에 영미가 휴대폰에서 귀를 떼고는 실망스런 소식을 전했다.



“오기 싫다는데요? 오늘은 지겨워서 게임 그만할 거래요.”

“에이! 그러지 말고 더 꼬셔봐. 게임 싫으면 술 사줄 테니까 공짜술 먹으러 나오라고 해.”

“흠…….”



회장은 정말 어지간히도 여자가 고픈 모양이었다.



“안주 뭐 사줄 거냐고 묻는데요?”

“그, 글쎄? 뭐 좋아하는데?”

“걔는 치킨 좋아해요.”



결국 회장이 치킨을 걸고 나서야 영미의 입에서 긍정적인 소식이 나왔다.



“콜.”



좋아서 날뛰는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괜히 홀로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





치킨집에 한 여학생이 문을 열고 나타났을 때……, 영미를 제외한 모든 동아리 부원들이 각자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수진. 나는 그녀만큼 내 이상형에 가까운 여자를 그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그녀의 외모를 처음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그녀가 그 싸가지 없는 놈과 동일인물일거란 생각을 완전히 털어버렸다.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찰랑찰랑 등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머릿결, 그에 어울리는 청초한 얼굴……. 아나운서를 연상시키는 단아한 이목구비가 먼발치에서도 조각처럼 빛났다.



“안녕하세요. 영미 친구 정수진이에요.”



영미 친구가 오면 한꺼번에 환호성을 지르자고 약속했던 남자 부원들이었지만, 그녀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자 입을 열지도 못하고 다들 멍하니 굳어버렸다. 그 넋 나간 표정을 살핀 영미는 입이 샐쭉 튀어나와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이래서 수진이 너 안 부르고 싶었는데.”

“…….”



나라고 다른 남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상형을 발견했다는 설렘 때문인지 더 노골적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마치 베이글의 표본을 보는 듯 했다. 청순하고 맑은 인상의 얼굴에 비해 몸매가 아주 고혹적이었다. 그저 평범한 티셔츠에 타이트한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굴곡이 더 돋보였다. 가슴과 허리, 엉덩이의 구분이 뚜렷해서 몸 전체가 대문자 S를 그리고 있었다.



“아, 흠, 흠. 반가워요, 수진 씨.”



회장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지만 눈은 여전히 가슴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네에……. 영미가 하도 불러서 오긴 왔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요.”

“여기 있는 애들이 다 아까 같이 게임했던 오빠들이에요.”

“아, 그렇구나. 호호…….”



그녀가 수줍게 웃자 또다시 남자들이 헤벌쭉 넋이 나갔다.



“너무 잘하시던데요. 진짜로 아까 그 날아다니던 분 맞아요?”

“네에. 저에요.”

“웬만한 남자들은 상대가 안 되겠어요. 평소에도 게임 좋아하시나요?”

“그렇게 자주 하는 편은 아닌데, 좋아하긴 해요.”

“와! 혹시 마음 내키면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요?”



그녀가 치킨이 어쩌고 비싼 척 한다며 처음에 고깝게 봤던 아이들은 그녀의 등장과 동시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영미의 환영 파티로 시작되었던 회식이 순식간에 정수진을 꼬드기기 위한 자리로 돌변했다.



“글쎄, 그러면 공부 더 안하게 될 것 같은데요. 호호.”

“안 그래요. 그냥 가끔 기분전환으로 노는 정도에요! 그치, 영미야?”

“몰라요! 오늘 처음 들어왔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나도 신입인데 지금 수진이 왔다고 다들 얘한테만 정신 팔려가지고……. 서러워서 탈퇴 해야겠네 이거.”

“에이, 무슨 섭섭한 소리를. 영미 네가 이제 우리 동아리 여신인데.”

“어머, 그럼 제가 들어가도 영미한테 밀릴 테니까 그냥 안 들어갈래요.”

“여신이 하나뿐이란 법은 없죠.”



칙칙했던 남탕 사이에 여학생 둘이 앉게 되니 그 파급효과가 무지막지했다. 평소엔 음울하게 말도 없이 술을 마시던 놈들이, 오늘은 저마다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발광을 해댔다.



영미와 수진이는 같은 학번이라 둘 다 나보다 네 살이 어렸다. 외모는 수진이 쪽이 월등히 뛰어났지만 성격은 서로 비슷한 모양인지 둘 다 남자들과 곧잘 어울렸다. 하지만 워낙 털털한 영미에 비하면 수진이가 조금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주로 영미가 왁자하게 떠들어대면 수진이가 덩달아 몇 마디 하는 정도였다.



“저기……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네?”



어느 순간 수진이가 내게 그렇게 물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 대놓고 봤던 걸까?



“아…… 예뻐서요. 제 이상형이에요.”

“풋.”



그녀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주변 남자들이 모두 내게 야유를 보냈다. 벌써부터 경쟁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았다.



“뭐야, 이거! 벌써부터.”

“속 보인다, 속 보여.”

“…….”



지들이 뭐 다를 게 있다고……. 하지만 다행히도 수진이는 꽤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았다.



“왜요, 저는 기분 좋은데요 뭘.”

“우리 동아리 들어와요. 그럼 완전 여왕님 될 수 있어요.”

“호호, 생각 좀 해볼게요.”



결국 그 날 게임은 뒷전으로 미루고, 좋은 분위기에서 다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





회장이 수진이를 꼬드기기 위해 했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수진이가 동아리에 들어온 이후, 그녀는 그야말로 동아리의 여왕이 되었다.



“여왕님! 식사하셨습니까? 제가 대접할까요?”

“아, 왜 그래요. 진짜. 호호호.”



남자들은 거의 수진이를 숭배하다시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삭막한 곳에서 수진이 같은 미녀의 비중은 그 존재만으로 이미 설명이 끝나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수진이 역시 은근히 남자들의 그런 대접과 시선을 즐기는 것 같았다.



“오빠, 수업 들어가요?”

“아, 응. 안녕.”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지만 그리 설렐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러 남자들에게 모두 싹싹하게 대했다. 내 이상형인 그녀에게 당연히 호감이야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내게 관심을 가질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애초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저 공강이라 너무 심심한데, 같이 PC방 갈래요?”

“…….”



공부를 안 하게 될 것 같다며 걱정하던 말들은 다 내숭이었는지, 그녀는 오히려 남자들보다 게임을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안 돼. 나 이거 빠지면 위험해. 영미랑 가.”

“영미 조별과제 때문에 바쁘단 말이에요.”

“그럼 혼자가든지.”

“치…… 재미없어.”



쪼르르 달려가 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캠퍼스를 올라가고 있는데 자꾸만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휴…….”



결국 나는 수업을 빼먹고 다시 내려와 평소 수진이가 자주 가는 PC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그녀가 정말로 혼자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모니터에 열중하고 있는 자그마한 뒤통수가 보였다.



“야! 정수……”



나는 그녀를 부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녀의 모니터에 비치고 있는 그 게임이 내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내가 가끔 했었던, 지금은 유저들에게 인기가 조금 시들해진 RPG게임이었다.



‘…….’



잠깐 고민하던 나는 그녀 몰래 PC방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수진이가 하고 있는 그 게임에 접속했다. 한때 조금씩 키웠던 그 캐릭터는 여전히 잘 살아있었다. 그래봐야 쪼렙일 뿐이었지만…….



서버에 접속한 나는 아까 모니터 너머로 봐두었던 수진이의 캐릭터가 있는 필드로 내 캐릭터를 이동시켰다. 뚜렷하게 빛나는 그녀의 아이디가 한눈에 내 심금을 울렸다.



jinistar(지니스타)…….



‘진짜 얘가 맞을까?’



솔직히 너무 오래된 일이기도 하거니와, 수진이가 도저히 그럴 것 같이 생기지 않았기에 나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그녀의 캐릭터 주변을 어정거리며 배회하기만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내 캐릭터를 알아보진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다행히 나는 게임마다 ID가 다를뿐더러 그녀는 내게 관심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어?”



그냥 가서 아는 척을 할까 생각할 때쯤, 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수진이의 캐릭터가 어느 순간 단숨에 다가와 내 캐릭터를 슥 썰어버린 것이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나는 동시에 격한 호기심을 느끼며 지니스타에게 채팅을 걸었다.



‘뒤질래?’

‘ㅋㅋㅋㅋㅋ죽여보든가 ^^’



신기하게도 말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그 싸가지 없는 느낌이 머릿속에서 고스란히 떠올랐다. 나는 흘끗 멀리 떨어져있는 수진이의 자리를 보았다. 그녀의 옆얼굴만 간신히 살짝 보였는데 분명 입이 웃고 있었다.



‘저번에도 이러더니 상습이냐?’

‘나한테 뒤진 적 있음? 내가 원래 허접새끼들 잘 패고 다녀서 ㅎㅎ’

‘너 진짜 그러다 크게 혼난다.’

‘이잉 무서워 ㅠㅠ 혼내줘 봐 등신아ㅋㅋㅋㅋㅋ’



예전에는 그저 화가 나기만 했는데 지금은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했다. 그동안 설마 했던 정수진의 실체를 비로소 알게 된 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내심 궁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 찾아가서 혼내줄 테니까 딱 기다려라.’

‘ㅋㅋㅋㅋㅋㅋ뷰웅신. 맘대로 하세요. ^^ㅗ’

‘너 남자냐, 여자냐?’

‘맞춰봐 호구야 ㅎㅎ’

‘왠지 여대생일 것 같은데.’

‘올ㅋㅋㅋㅋ 허접새끼 주제에 눈썰미 좋네?’

‘OO대학교 다닐 것 같은데?’



그제야 수진이의 캐릭터가 한동안 침묵했다. 고개를 슬쩍 들어 실제 얼굴표정을 살펴보니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ㅋㅋㅋㅋㅋㅋㅋ찍은 거야?’



억지로 ‘ㅋ’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한순간에 욕설도 사라졌다.



‘글쎄. OO과 다닐 것 같은데?’



그녀가 또 침묵했다.



‘그리고 OO시 OO구에 살고 있을 것 같아. 나이는 21살 정도일 것 같고. 휴대폰 번호까지 한번 맞춰볼까?’

‘너 누구야?’



그녀의 표정이 굳어져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나는 홀로 숨죽여 킥킥거렸다.



‘나 해커야. 저번에 니가 나 죽인 거 때문에 열 받아서 네 아이디 좀 조사해봤거든. 신상 거의 다 캐냈는데 혼내줄까 하다가 불쌍해서 한번 봐줬지.’

‘웃기고 있네ㅋㅋ 누군지 빨리 말해’

‘믿거나 말거나.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혼 좀 내줘?’



이제는 움직임까지 완전히 정지한 채로 가만히 서 있는 지니스타를 보니, 자꾸만 짓궂은 장난기가 스멀스멀 엄습했다.



‘너 오늘 밤까지 게임 커뮤니티에 반성문 써서 올려. A4 두 장 내외로 정성껏. 그럼 그냥 봐줄게. 안 그러면 진짜 찾아가서 혼내줄 거다. 명심해.’



그 순간, 수진이가 자리를 박차고 모니터 앞에서 일어섰다. 나는 움찔 놀라서 혹시라도 그녀가 PC방 안을 둘러보는 것은 아닌가 싶어 긴장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계산을 하고는 다급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푸하핫.”



그 뒷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나는 한동안 계속 낄낄거렸다.



“자…… 이제 어떡한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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